2024년 9월 11일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일할 때 ‘열심히 달린다’는 표현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중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회사에서 일할 때 ‘열심히 달린다’는 표현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중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진짜 달리기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솔직히 아직 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뛴 게 올해 4월이었는데, 마음 상태가 정말 안 좋았었다. 출근하려고 차에 앉아 시동을 걸면 변속기를 D로 바꾸고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기까지 한참이 걸릴 정도로 차에 한참 앉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달리기는 일종의 치료처럼, 치료약을 복용하는 느낌으로 했었는데 의무감이나 필요에 의해 하는 일은 지속하기 어려웠다.
거의 5개월 만에 다시 뛰는데,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는 내가 뛰고 싶은지 아닌지를 선택할 수 있고, 가다가 힘들면 멈추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페이스 조절하던 느낌이 꽤 아득해졌고, 미드풋으로 땅을 밀면서 가는 느낌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40분 정도를 530으로 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페이스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시작은 아무리 여러번이어도 어렵다. 내가 일을 하고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일단 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그게 생각보다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켜서 탄천으로 가야지, 결심을 하고 문밖을 나서는 것까지가 가장 어렵다. 사실 문밖을 나서고 나면 달리는 것은 그것에 비하면 너무나 쉽다. 좀 더 먼 거리를 뛰어보고 싶었는데 10k를 아직 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평일 출근 시간대에 문밖을 나오면 사람들은 어디론가 일을 하러 간다. 표정이 밝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 사람들 얼굴이 보기 싫어서 신발을 보면서 발바닥 중앙으로 착지하는 것에 신경쓰면서 달린다. 같은 시간에 탄천에서 달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무엇인가로 충만해져 있다. 주어진 시간에 물리적으로 얽매여 있지 않고 행동에 자유가 생긴다는 것은 이런 기분이구나. 부자가 되면 비슷한 기분일까. 부자의 정의도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그게 마음을 의미하든 돈이나 숫자를 의미하든 어쨌든.

왜 달릴까? 치유 받기 위해서? 얼마전에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시 읽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은 달리는 이유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은 상태가 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공감했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상태가 되기는 정말 어려운데 우리 뇌가 생각이나 의식의 진공 상태를 버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요즘 사람들은 더 그렇겠지. 물론 달리면서도 ‘덥다’, ‘춥다’ 같은 직관적인 생각을 피하기는 어렵지만 뛰면 뛸수록 생각의 진공 상태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언어적으로 설명하기도 조금 곤란했던 것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