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5일
진주에서 생각한 것들
연휴에 진주에 다녀왔다.
연휴를 일주일 조금 넘게 남겼을 때 쯤에야 긴 연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월요일에 휴가 쓰면 금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쭉 이어서 쉬는 드문 연휴였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탐포포에서 지헌씨가 말해준 진주의 <르몽트뢰 Le montreux>가 떠올랐다. 선희와 진주에 가기로 마음먹고 교통편과 숙소를 급히 알아봤다.
오래 전 군생활을 진주에서 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진주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다. 2년 넘게 진주에 있었지만 군대에서 만난 친구들과 딱히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어서 휴가 나오면 터미널로 가서 가장 빠른 버스표로 집에 가기 바빴다. 복귀할 땐 최대한 늦게 진주에 도착해 부대로 들어갔었고.
사실상 진주를 제대로 구경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느낌이 좋은 도시였다. 조용하고 잘 정돈되어 있고, 밀도가 낮았다. 지나치게 밀도가 높은 서울에 있다가 진주에 오니 모든 거리나 공간이 한산하게 느껴졌다. 진주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딘가 샤이하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점잖았다.
1. 음악에 대한 생각

몽트뢰는 생각보다 넓진 않았지만 더 좋은 곳이었다. 진주에 머무르는 3박 4일 동안 이틀 밤을 여기서 보냈다. 적당히 술 마시면서 음악을 크게 듣는데 집중할 수 있는, 번잡스럽지 않은 공간은 정말 드물다. 아마 인우가 해외 출장 떠나고 없는 중훈이네 집 정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그 조건에 부합하는 공간이지 않을까 싶은데… 몽트뢰도 중훈이네 집 정도로 좋았다.

사실 몽트뢰의 본체는 사가라상이라고 할 수 있다. 7년 전에 이곳을 열면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사가라상은 DJ로 일본 씬에서도 유명한 사람이고, LP 레코드샵의 스태프였다고 한다. 진주 사람인 한국인 친구가 이런 가게를 만들고 싶다고 해서 일본을 투어하면서 오리지널 판을 셀렉하고 수집해주었는데, 정작 이걸 틀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직접 넘어와서 운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공간에서 음악을 잘 틀려면 어떤 사람들이 와서 앉아있는지, 지금 사람들이 어떤 음악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누가 음악에 집중하고 있는지 같은 미묘한 분위기를 읽어야 할텐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내 생각에도 그 문제를 떠나 저 LP 라이브러리가 일단 머릿속에 들어 있어야 적절한 음악을 꺼내서 틀텐데 그런 사람도 사가라상 말고는 없을 것 같다.

사가라상은 이런 먼슬리 차트 리플렛을 매월 준비한다. 처음엔 차트라고 해서 순위 같은 건가 했는데 보니까 그런 건 아니고, 매월 테마를 정해 그 달에 자주 소개할 음악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마침 5월 차트가 준비 중인 기간이 겹쳐 4월과 5월의 테마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는데 4월에는 여성의 날이 있는 달이라 여성 뮤지션들을 소개했고, 5월에는 4월에 세상을 떠난 드러머 James Gadson(Master of groove가 그 사람이다)을 기리는 뜻에서 그가 세션으로 참여한 앨범들을 골랐다. 저 리플렛을 펼치면 소개할 앨범에 대한 소개가 작은 글씨로 빽빽이 적혀있는데, 옛날 CD사면 안에 들어있던 속지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재미있었다.
사가라상은 개드슨 생전에 같이 드럼 녹음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 하며, 차트에 소개되진 않았지만 개드슨이 참여한 유명한 앨범들을 소개해줬다. 재미있게 이야기 들었다. 음악을 디깅하다 하다 보면 저렇게까지 될 수 있구나… 생각했다.

내심 선희가 너무 지겨워하면 어떡하지 생각했는데, 여행 내내 매일 밤을 몽트뢰에서 보내는 것에 대해 선희는 아무 이견이 없었고 오히려 공간이 주는 매력에 빠진 것 같아 보여 나도 기분이 좋았다. 사가라상이나 주변 사람들과 명랑하게 대화하면서 진주가 너무 좋고, 교토보다 더 좋은 것 같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선희를 진주 로컬분들이 재미있다는 눈길로 보면서 감사하다고 하는 장면이 너무 웃겼다.

감사했다는 마음을 DM으로 보내며 새삼 음악이 내 삶에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새롭게 알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직접적으로 음악 취향에 대해 물어보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먼저 이야기 하거나 하지 않지만, 일단 좋은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에겐 경계심이 사라지고 이 사람과는 어렵지 않게 대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직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 깊은 관계로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음악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이거나 그런 게 계기가 된 경우가 생각해보니 대부분이어서 새삼 신기했다. (지금까지 그렇다는 생각은 못해봤었는데)
2. 진주에서 러닝하며 본 것

진주에는 남강과 영천강이 흐른다. 남강이 좀 더 큰 강이고, 영천강은 남강의 지류 같은 강인데 숙소 근처가 영천강변이어서 내심 아침마다 진주의 강변을 뛸 생각하며 진주에서의 러닝을 기대했다. 진주에서는 2번에 걸쳐 총 22k 뛰었는데 역시나 너무 좋았다. 탄천도 조용하지만… 훨씬 넓고 조용하면서도 잘 정비되어 있는 코스를 달리며 길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록색 장면을 보면서 계속 천천히 발을 굴렸다.
3. 우리가 좋아하는 여행의 방식

선희와 여행을 거듭하면서 점점 드는 확신은 우리가 좋아하는 여행의 방식을 우리는 찾아가고 있고, 선희는 꽤 좋은 여행 메이트라는 사실이다. 사실 진주 여행을 계획했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딱히 계획한 것 없었고 숙소와 교통편, 르몽트뢰 오픈 여부 정도만 체크하고 갔는데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특히 선희가 진주 너무 좋은 곳인 것 같다고 진심으로 이야기해줘서 좋았는데, 왜 그런지 생각해보면 조용하고, 번잡스럽지 않으면서 깨끗한 그런 공간과 사람에 마음을 뺏기거나, 편안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진주가 마침 딱 그런 곳이었다.
행복을 느끼는 것도 재능 내지는 삶에 주어진 축복이라고 하는데, 선희는 그런 면에서 나와 다르다. 행복감도, 실망감도 크게 느끼지 않는 나와 달리 선희는 행복해하기도, 실망하기도 자주 큰 폭으로 하는 편인데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면 기분이 좋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느끼는 선희를 보면서 나는 아마 평생 저렇게 될 수는 없겠지만 저렇게 살아야 할텐데 생각했다.
평생을 서툴게 살아왔는데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되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일이나 관계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취향의 문제 같은 평생 답 없을거라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나름의 답을 찾아가며 살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