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9일

제주에서 받은 마음들

크리스마스, 그러니까 이번 주 목요일부터 1월 1일까지 휴가가 생겼다.

크리스마스, 그러니까 이번 주 목요일부터 1월 1일까지 휴가가 생겼다. 한동안 회사 사람들이랑 주된 스몰톡 주제가 '오프위크 때 뭐할거에요?' 였기 때문에 뭐라 대답할지 생각해보다가 제주에 가기로 했다. 통상적으로 이른 시점에 정한 것은 아니지만, 고민이 시작되고 제주행을 결정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몇가지 이유들이 있었는데 접근성이 좋고 그런 일반적인 이야기들은 제외하고... 지난 10월 제주 여행 때 동선을 애매하게 짜서 정작 좋았던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게 아쉬웠고, 그때 관심이 생긴 장소와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더 오래 머물고 싶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꽤 좋은 여행이었다. 찾아간 곳들에서 과분한 환대와 친절을 받았고 덕분에 마음이 충만해진 상태가 되었다. 기대보다 많은 대화를 했고 무례한 사람이나 예상치 못한 불편함은 딱히 없었다. 상대에게 뭔가를 주거나 받아야 한다는 계산 없이 내 모습 그대로 잘 쉬었다 온 느낌이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선희랑 여행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새삼 좋은 여행 메이트라고 느꼈다. 그리고 선희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느꼈다.

맹그로브 제주시티

Image Image

4일 내내 맹그로브 제주시티에 머물렀는데, 만족스러웠다. 탑동 주변을 계속 돌아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위치는 말할 게 없었고, 방 컨디션도 가격에 비하면 훌륭하고 스탭들도 친절했다. 바다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7층에 체크인 카운터를 비롯한 캔틴, 워크라운지 등 공용 공간을 모아놓아 방문객들이 최대한 차별 없이 전망을 보도록 만든 시스템도 좋았다. 본질이 쉼의 공간인 호텔이지만 일에도 비중을 그만큼 둔다는 브랜드의 주장 같기도 하고. 자잘한 요청사항들에도 융통성 있게 잘 대처해주셨고... 아침에 간단한 조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 워크라운지에서는 모니터와 스탠딩데스크를 쓸 수 있는 환경이어서 여행도 하고 일도 조금씩 봐야 하는 상황이거나 워케이션 목적으로 방문한 사람이라면 더할나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Image

조식은 이런 느낌...

Image

방 컨디션은 이런 느낌. 티비가 없다. 적당한 포터블 블루투스 스피커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Image Image

체크인 기다리는 동안 캔틴에 앉아있는데 스탭 중 한분이 '오 마침 잘 오셨다'며 드립 커피랑 귤을 내어주셨다. 객관적으로 아주 훌륭한 커피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마음이 전해져서 좋았다.

팔즈(pals)

Image

팔즈에 갔다. 인스타그램이 없어져서 무슨 일일까 했지만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Image Image

이야기를 들어보니 카페 계정에 사장님 부부 아기 사진을 올린 것이 계정이 삭제된 사유인듯... 새로 만든 계정이 있긴 한데 예전 만큼 인스타 열정이 안 생겨서 기존 계정 복구에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라고. 여전히 사장님 쾌활했고 카페엔 사람이 더 많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25일에 갔는데, 26일부터 1월 1일까지 팔즈 또한 오프위크라 하마터면 못 만나고 돌아갈 뻔했다. 내심 매일 오전 러닝하고 팔즈로 출근할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져서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미안할 일은 전혀 아니지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셨다ㅋㅋ

Image

공간을 비롯한 브랜딩을 이루는 요소들의 감도도 중요하겠지만 이번에 느낀 건 이 곳에서는 취향이나 결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같은 공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분명 이 공간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딱히 여기에 있는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거나 하진 않지만... 그런 이유에서 오는 편안함이 분명 있다.

Image

인사하고 나오는데 별거 아니라며 봉투에 선물을 챙겨주셨다.

Image

숙소에 와서 열어보니... 드립백, 바나나브레드와 함께 이런 귀여운 편지가ㅠ 계속 일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언제 쓰셨지? pals 일동은 누굴까? 사장님 부부와 아기? 그래봤자 셋 뿐인데 일동이라고 쓰신 것도 넘 귀엽ㄷㅏ... 각자의 자리에서 뽜이띵해야지...

허상점

Image

허상점에 갔다. 선희 얼굴형에 맞는 안경을 찾고 있는데 계속 결정을 못하고 있다가... 트락션의 더블 브릿지 안경을 써보고 싶어서, 여차하면 구매할 생각으로 왔는데 이미 주인을 찾아가고 없었다. (2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것 저것 써보면서 한참 이야기 나누고... 고려했던 다른 몇몇 안경 브랜드들의 아쉬운 점들 이야기 하다가...

Image

대만 브랜드인 클라시코로 결정. 대만에도 이런 안경을 만드는 메이커가 있었는지 몰랐는데 만듦새가 너무 좋았고, 안경 모양도 클래식해서 유행 없이 데일리 안경으로 쓰기에 적절해보였다. 선희가 마침(?) 렌즈를 안 챙겨오는 바람에 바로 착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피팅 봐주실 수 있는 다른 안경점(디테일 안경, 여기도 멋진 안경 너무 많더라고요...)도 연결해주셔서 좋았다.

Image

선희가 허상점 사장님 스타일을 너무 좋아해서... 마지막 날에도 한번 더 찾아뵈었다. 감사히도 타이벡 소재로 만든 작은 가방과 귤을 선물 받았다. 무엇보다 안경을 보는 안목이 넓혀지는 경험을 하게 되어 좋았다. 어떤 요소들이 안경 그 자체와 착용했을 때의 인상을 좌우하는지 막연히 갖고 있던 직관이 개념화/구조화되어 이해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느낌이랄까. 이제 선희와 안경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안경이 왜 멋진지, 왜 안 멋진지 보다 구체적인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소비의 범주가 더 넓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긴 하지만...

카고크루즈

Image

카고크루즈에 갔다. 카고크루즈는 비건 식당인데 딱히 비건 식당이라고 분류할 필요 없이... 근처 모든 식당들 중 가장 공간과 브랜딩 감도 높고 요리 솜씨도 좋은 집이라고 생각한다. 파스타, 후무스, 샐러드 같은 것들을 파는데 여기서 하는 음식들을 딱히 국적으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Image Image Image

코스터에 있는 고양이 그림을 봐주세요... 와인은 반병 단위로도 마실 수 있어서 괜찮은 금액에 딱 적당히 마실 수 있다.

Image

원래 갈치속젓 파스타로 가장 유명한 듯 하지만 사실 모든 음식이 다 맛있다. 이번에는 처음 보는 메뉴인 카레라이스 먹어보려고 왔는데 마침 밥이 다 떨어져서 주문이 어렵다고 해서 아쉽지만 파스타 2개 주문했다. 그런데 '밥은 없지만...' 하면서 빵이랑 조금 먹어볼 수 있게 내주셨다. 진짜 개맛있네... 커리랑 견과류가 이렇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는데요. 덕분에 커리까지 맛볼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디마노 엔마노(dimano/enmano)

Image

팔즈 2층에는 선물가게 디마노, 샐러드가게 엔마노가 있다. 이탈리아어는 잘 모르지만 디마노는 from hands, 엔마노는 to hands라는 뜻이라고 한다. 손에서 손으로? 같은 느낌일까. 선물이나 샐러드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다는 이미지가 그려진다. 가게 문을 열면 뛰어나오는 웰시코기도 있다. 10월에 왔을 때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사지 않았던 꽃병이 혹시 남아 있는지 보려고, 그리고 이번엔 샐러드도 먹어보려고 왔다. 디마노와 엔마노는 샵인샵처럼 같은 공간을 나눠서 쓰고 있다. 사실 매장 운영의 효율 관점에서 보면 설명하기 난감한 구조이긴 하지만 매장에서 두 사장님들의 취향 너무 잘 느낄 수 있고, 멋진 공간을 온전히 내 힘으로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아득한 일인가 실감하게 되는 공간이다.

Image Image

당근 수프와 샐러드, 과일... 곡물이랑 구운 야채들로 온기가 있는 느낌의 샐러드다. 자세히 보면 기물들 또한 옛날 유럽 빈티지 제품들이다.

Image

이야기 나누다 보니... 커피도 주셔서 그냥 넙죽 받았다... (이래도 되나) 커피는 1층 팔즈의 드립백. 따뜻하게 마시니까 원두의 과일향이 훨씬 더 풍부하게 느껴지네.

Image

세상에 멋진 떼기들은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70년대에 스웨덴에서 만든 새 피규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Image

그리고 무엇보다 관심이 가는 제품의 생산지나 브랜드를 보기 위해 제품을 뒤집어보거나 바닥을 기어다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저건 옷걸이를 보고 있는 저입니다...) 팔즈도 그렇고, 여기도 토스 프론트 결제 단말기를 쓴다는 것도 훌륭한 점이다... (하하...)

Image

뭔가 마음을 전해 받은 것 같이 느꼈던 순간들만 남겨봤는데도 꽤 많은 장면들이 있었다. 그만큼 좋은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싶네. 올해 사람이나 일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오랜만에 인간으로서 성장한 느낌 받은 한해였는데 올해 있었던 일들도 쉬는 동안 좀 남겨봐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