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1일

취향에 대한 생각

취향은 실체가 없다.

취향은 실체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들의 일관된 경향이 취향일진대, 점을 선으로 연결하듯 어떤 형태를 특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관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변하기도 한다. 일정 부분은 가치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취향을 더 뾰족하게 벼려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한히 확장하려는 사람도 있다.

타인의 다른 취향을 쉽게 수용하는 사람도 있고,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애초에 취향이라 말할 것 자체가 없는 사람은 엄청나게 수용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배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취향이 일종의 문화권력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다. 좀 더 좋은 취향을 향유하는 것이 일종의 지위와 결부된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애초에 취향의 좋고 나쁨은 상대적이라서 성립되지 않는 얘기다. 루이비통 로고가 크게 쓰여있는 스타디움 자켓을 누군가는 멋지다고, 누군가는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힙스터가 누군가에게는 워너비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비웃음거리인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상대주의는 가장 게으른 사람의 편리한 결론일지도 모르지만, 취향의 영역에서는 상대주의를 지지한다. 알거나 모름에 따라 나뉘는 에티켓이 아니라 일종의 가치관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치관에도 옳고 그름이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 그릇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설득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많나? 그렇지만 딱히 그들이 부지런해서는 아닐 것 같다…)

취향을 상대주의라는 성역에 가두면 몇가지 장점이 있다. 일단 불필요한 논쟁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수용도와 이해도가 높아진다. 어떤 취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할 부당한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의 취향을 함부로 언급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태도가 훨씬 멋지다. 편집샵 실장님처럼 멋지게 입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옷차림을 지적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전투복 정장을 입은 아저씨가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실망스럽고 구려보인다고 생각한다. 음악에 평점을 매기는 사람보다 우효 음악을 듣고 좋다 말하는 김구라가 멋지다.

이런 생각을 갖게되면서 일부러 새로운 음악을 찾아듣기도 하고, ‘고프코어’나 ‘아메카지’를 입은 사람들의 착샷을 구경하기도 한다. 250의 신작 앨범 ‘뽕’도 수용적인 태도로 들어보고 있다. 이센스형도 좋다고 하고, 힙플이나 인스타에서도 난리니까… 좋은가? 나쁘지 않은데 내가 지금까지 들어봤던 음악은 아니다. 거실 스피커로 틀어놓고 아리송해하고 있는데, 아내가 뭘 그런걸 듣고 있냐고 10초 안에 당장 끄라고 한다. 어쩌면 본인 기준으로 10초 안에 좋음과 구림을 바로 판단할 수 있는 게 그것조차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보다 멋진건가? 취향은… 어렵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