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5일
2022년 2월 3일
난생 처음 지리산에 올랐다.
난생 처음 지리산에 올랐다. 산과 자연은 너무 위대하고 나는 나약하다. 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리산으로 가는 심야버스를 타기 위해 밤 10시에 집을 나섰다. 중산리로 가는 버스가 있고, 백무동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데 중산리행은 주말에만 운행한다. 수요일 밤에는 동서울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백무동행 버스를 타야했다.

터미널은 한산했지만 명절 연휴의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느낌이었다. 등산객들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양손에 큰 짐을 든 사람들도 보였다.

버스에서 충분히 자야했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이래저래 자세도 바꿔보고 시트 각도도 조절해봤는데 여의치 않았다. 깊게 잠드는 건 포기하고 눈 감고 최대한 아무 생각도 안하려고 노력했다. 블로그에 훈련일지를 한편 썼다.
지리산행 버스에 탔는데 등산복 차림이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함양 터미널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해뜰 때까지 춥고 어두워서 사진이 없음)
백무동 터미널에 도착해서 핫팩을 데우고, 옷도 챙겨입고 스틱도 조절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간단히 정비를 마쳤다. 4시부터 입산 시간이어서 4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바로 등산을 시작했다.
사위가 깜깜했는데 헤드랜턴 불빛에 의존해서 장터목 대피소 방향으로 걸었다. 시작부터 오르막이 계속되어서 버거웠다. 시야가 제한적이니 어디까지 오르막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올라갈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그런 느낌은 점점 사라졌다.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최소한의 휴식만 가지면서 계속 올랐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보면 별이 엄청 밝았는데, 별인지 나무에 붙은 눈송이에 반사된 랜턴 불빛인지 분간이 잘 안 됐다. 참샘에서 물병에 물을 보충했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지쳐갈 때쯤 소지봉이 나왔다. 소지봉부터 장터목 대피소까지는 완만해진다는 코스 정보를 보고 왔는데 정말 그랬다. 양 옆에 갈대가 서 있는 좁은 길도 있었고, 푹신한 흙길도 나왔다. 물론 바위와 계단으로 된 오르막도 있긴했지만 확실히 걷기 편했다.

멀리 장터목 대피소 불빛이 나오자 안도감이 몰려왔다. 사실 제일 불안했던 건 랜턴의 불빛이었다. 랜턴을 오래 켜본 적이 없어서 배터리가 언제까지 버틸지 잘 몰랐다. 갑자기 랜턴이 꺼지면 어떡하지 생각했는데 다행히 장터목 대피소까지 계획보다 일찍 도착했다.

장터목 대피소 취사장으로 들어와 뜨거운 물에 차도 마시고, 밥이랑 컵라면도 데워먹었다. 해뜨기 40분 전에 장터목에 도착했고 천왕봉까진 1.9km가 남아 있어 걸음을 재촉하면 천왕봉 일출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조금 쉬기로 했다. 날씨도 흐렸고 긴장도 풀고 몸도 좀 녹이고 싶었다.
출발하기 전에 등산화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아크테릭스 노반LD를 신었다. 발이 시렵지 않을까 했지만 꽤 긴 거리를 빠르게 등반해야 하기 때문에 가벼움을 택했다. 다행히 발이 시렵거나 하진 않았다. 천왕봉으로 가는 능선에서는 바람이 너무 불어서 약간 발가락에 감각이 없는 느낌이긴 했지만 괜찮았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천왕봉 방향으로 걷는 중에 해가 떠올랐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에 햇빛이 빨갛게 반사된 모습은 너무 경이로웠다. 육성으로 우와… 감탄사가 나왔다.

제석봉에서 일출과 멀리 겹겹이 펼쳐진 산그리메를 넋놓고 쳐다봤다. 한쪽에선 해가 떠오르고, 반대쪽엔 고사목이 있는 풍경이 이질적인데 아름다웠다. 바람이 미친듯이 불었는데 바람소리가 마치 파도소리처럼 들려서 여기가 산인지 바다인지 정신이 홀리는 기분이었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멋있는 정상석 1티어로 꼽히는 정상석이 꽂혀있는 천왕봉에 도착했다. 천왕봉 직전부터는 그냥 갖고 있던 모든 옷을 다 껴입었다. 그래서 오히려 춥지는 않았다. 정상석에 앉아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중산리에서 올라왔다. 사진을 찍어드리고 새해 인사를 주고 받았다.
정상석을 보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어…’ 하면서 한자를 읽는 대신 말을 돌리는 상황극 같은 걸 생각했다. 왜 여기까지 와서 이딴 생각이 드나 싶었다.

해가 뜨자 지나온 길이 잘 보였다. 눈이 엄청나게 쌓여있었구나. 괜히 스틱을 찔러 얼마나 깊게 들어가나 봤다.


지리산은 정말 거대했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면적 기준으로 북한산 국립공원의 6배라고 한다. 멀리 겹겹이, 끝없이 펼쳐진 능선들을 보고 있는데 물결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바람소리가 파도소리처럼 느껴졌던 것도 새삼 신기했다.
제석봉에서 짐을 정리하다 아크테릭스 파카를 잃어버렸다. 주변을 샅샅이 찾아도 없고, 짐 정리할 때 같이 있었던 분을 급히 쫓아가 물어보는 실례를 범했는데도 파카를 찾을 수 없었다. 어이없는 실수를 한 자책감에 빠져 그저 하산을 서둘렀다.
원래 세석대피소를 거쳐 좀 더 걸을 생각이었는데 아까 그분을 의심해 올라왔던 길로 급하게 내려와버려 그냥 그 길로 쭉 내려왔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다. 실수로 고가의 파카를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을 의심하다니 내가 너무 못난 인간처럼 느껴졌다.
산을 내려오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으로 합리화를 마치고, 혹시 모르니 관리사무소에 자초지종과 연락처를 남겨두었다. 파카 덕분에 강추위와 바람에서 몸을 보호할 수 있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내려오는 길이 오히려 더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갔다. 꽤 가파르기도 하고, 바위가 얼어 있는 구간이 있어 아이젠을 신었는데도 두 번 미끄러졌다. 마음이 좀 지쳐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내려가는 길도 올라가는 길 만큼이나 길고 힘들었다.
무사히 내려와 1시 반 버스를 예매했다. 12시 반에 내려왔으니 휴식시간과 파카 찾는 시간까지 포함해 대략 8시간 반 정도의 등산이었다.

식당에서 맥주와 메밀전을 먹고 버스 시간이 되어 버스를 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좀 더 깊게 잠들 수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