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1일

제자리에 있는 것들

진주에 다녀왔다.

지난 4월에 진주 르몽트뢰에 다녀온 뒤로, 언제든 시간이 되면 다시 가고 싶었다. 좀처럼 결심을 못하다 지난 화요일 선희 생일에 잔뜩 취한 상태로 집에서 음악 듣다가 사가라상에게 DM을 보냈다. 금요일에 계시면 가겠다고. 조금 갑작스럽지만 한글날 연휴를 활용해 1박 2일로 진주에 다녀왔다. 10월 치고 아침 저녁은 춥고, 낮은 더워서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여전히 좋은 곳이었다.

출발 당일 아침, 고속버스터미널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버스 기다리는 동안 꽃시장 구경했다.

과장이 아니라 숲속에 온 기분이었다.

맨 뒷자리로 예매하게 됐는데 기사님이 에어컨을 끄니 너무 더웠다. 다들 더운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참다가… 옆에 있는 학생들도 더워하길래 그냥 맨 앞으로 걸어가서 너무 더우니 에어컨 틀어달라고 했다. 자리에 돌아오니까 학생들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너네도 더우면 그냥 가서 말하면 되잖아…

이도류 선희… 진주 도착해서 간 곳들과 느낀점 하나씩 적어볼게요.

하연옥

도착하자마자 점심 먹으러 간 곳. 르몽트뢰 골목에 있다. 진주냉면은 저번에도 먹어봐서 중앙집 갈까 여기갈까 고민했었는데 중앙집 추억 보정된 노포에 불과하다는 리뷰가 많고 음식 사진으로 봤을 때도 그렇게 성의 있어 보이는 음식이 아니라 하연옥으로. 진주냉면(비빔), 돼지국밥, 육전 주문했는데 둘이서 먹기에 많았다. 냉면하나 육전하나 주문했어도 됐을듯. 음식 깔끔하다. 웨이팅 있었는데 회전이 빨랐다.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에 도착해서 밥먹고, 건축가 김수근이 지었다는 진주국립박물관에 갔다. 숙소비가 너무 비싸다했더니 유등축제기간이었다. 원래 진주성이랑 박물관 아주 한적한 곳이었는데 지난 번 방문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국현미 수준 인파속에서 전시 보느라 건축 구경할 여유는 없었다.

진주 박물관의 놀라운 점은 진주성 안에서 한참을 들어갈 때까지 건축물에 전혀 존재감이 없다가 박물관 앞마당에 들어서면 웅장하게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진주성보다 박물관이 커보이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겠지…

사천 출신의 재일교포 사업가가 굉장한 컬렉션을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임진왜란 유물 보다 이쪽이 훨씬 멋졌다. 운좋게 아주머니 도슨트를 마주쳐 저 사진의 소상팔경도, 정조 어필에 대한 스토리 들었는데 흥미로웠다. 아는 만큼 더 보이는 것 같다. 소상팔경도 한번 더 봐두고 싶어서 나가기 전에 보고 갔다. 임진왜란 특별관보다 사람이 적고 관람 동선이 자유로워서 좋았다.

사실… 나는 조선시대에 이 땅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무능한 세습 왕조, 수탈 당하기만 했던 역사, 사농공상의 비합리적인 사회는 딱히 반면교사로 삼기에도 좀… 하지만 조선시대 백자는 예쁘다.


올드벗베럴

유등 축제 때문에 온 건 아니지만 기왕 온 김에 축제 즐기기로 한다. 어두워질때까지 기다렸다 불꽃놀이와 불 밝힌 유등 구경하려고 올드벗베럴에서 선희는 주스, 나는 와인 마셨다. 이번주까지가 야장하기 좋은 날씨다. 여기는 인스타에서 진주 검색하면 많이 나오는, 잘 알려진 곳이다. 업장 위치가 너무 좋다. 축제 무드도 좋지만 조용할 때 와서 남강뷰 보면서 커피나 와인 마시면 좋을듯.


남강

어두워지니까 뷰가 멋졌다.

지노(gino)

8시에 불꽃놀이 봐야하는데 배도 고프고 시간도 애매하게 떠서 트라토리아 지노(gino)라는 곳에 왔다. 남강 다리가 바로 보이는 곳인데 밖에서 보기에 빈자리가 많이 보이길래 들어왔다.

알고보니 불꽃놀이 시간 맞춰서 운영하는 예약석들이었고 아직 손님들이 안 온 것이었다. 다행히 워크인 손님을 위해 마련된 애매한 위치의 테이블들이 있어 여기서 밥 먹으면서 불꽃놀이 봤다. 가격에 비해 음식 나쁘지 않았고, 음식이 많이 늦게 나오긴 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룩백 복습했다. 화이트 와인은 시원하게 해서 내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르몽트뢰

사실상 진주 방문의 목적… 르몽트뢰에 왔다. 사가라상이 반갑게 맞아주셨고 다행히 바에 자리가 있어 앉을 수 있었다. 어떻게 지냈냐고 여쭤봤는데, 플레이리스트 만들고, 플레이리스트 만들고, 플레이리스트 만들면서 사람은 안 사귀고 음악만 ‘사귀면서’ 지냈다고 했다. 사가라상 다운 대답이었다.

10월 먼슬리 차트는 ‘Late night music’이 주제였다. 매월 플리 만들고 이런 리플렛 만드는 것도 너무 수고로운 일이겠으나, 손님 입장에선 좋다. 다만 술 마신 상태에서 글이 잘 안 읽히는 게 문제다. 컴필레이션 앨범은 뭔가 잘 안 듣게 되는 편인데, 사가라상은 커리어 초반에 컴필레이션 앨범 들으면서 음악 듣는 스펙트럼 엄청 넓힐 수 있었다고 한다. 저 앨범들 중에서 선정한 10개 앨범들 중심으로 들었는데, 분명히 들어봤던 앨범인데 여기서 들으니까 3배 더 좋게 들렸다.

써니가 서울로 올 생각 없냐고 했는데, 사가라상이 오사카에 있는 친구 이야기를 들려줬다. HMV에서 일하는 LP 바이어인데, 음악 듣는 게 일인 사람이다보니, 최근 몇년간 음악이 좋게 들린적이 없었는데 르몽트뢰에 와서 들으니까 음악이 너무 좋게 들렸고 한다. 여기서 들은 레코드 몇장을 일본으로 돌아가서 바잉할 정도로. 물론 음악 셀렉션이나 공간이 좋은 것도 있지만, 사가라상은 음악을 들을 때의 마음의 여유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르몽트뢰가 진주에 있으니까, 진주에 오게 되고, 오기로 결심하기가 어렵지만 막상 오면 마음이 편해진다. 똑같은 음악을 들어도 더 좋게 들리는 것은 스피커 성능이나 음질 같은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에 르몽트뢰가 서울에 있어서 매일 갈 수 있다면, 출근하기 전날 밤에 음악이 좋게 들릴까? (그래도 술 좀 마시면 좋게 들릴 것 같다.)

르몽트뢰와 사가라상은 지금 제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진주를 찾아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응원하기로 했다.

요즘 우유 스팀 익히고 있는 써니… 사가라상 스킬 훔치는 중이다. 라떼 화이팅. 그 사이에 가구를 하도 봐서 몰랐던 업장의 디테일도 보인다. 써니랑 동시에 장 프루베의 비트라 선반이 있었다는 사실 인지했다. (위 사진 속 써니 머리위에 있는 벽 선반이 바로 그것이다)

르몽트뢰 앞에서 사가라상과 기념사진 찍고 숙소로… 씻고 눕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원래 브이 잘 안하는데 술 취했나보다.


남강변 달리기

어제 술은 마셨지만 날씨 너무 좋아서 뛰러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진주에는 남강이 있는데, 한강에 비하면 크지 않지만 깨끗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러닝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날씨가 워낙 좋아서 경남문화예술회관 건물이 강에 깨끗하게 비쳐보인다. 저 건물은 건축가 김중업씨가 설계한 건물이라고 한다. 가까이서 보면 엄청 웅장해보인다.

5k 가볍게 뛰고 숙소로 복귀했다.


마르탱

1박 2일의 짧은 일정 마지막 날 아침, 이르게 체크아웃하고 르몽트뢰 바로 맞은 편에 있는 마르탱으로 왔다. 우리 숙소는 호텔 동방이라는 곳이었는데 추천하지 않습니다ㅠ 로비나 건물 외관은 리뉴얼해서 깨끗해 보이는데 정작 숙소 내부 상태는 별로였다. 방 전체에서 안 좋은 냄새가 났고, 침구는 눅눅한 느낌이 들었다. 암튼 마르탱은 음악이 좋고, 커피나 디저트도 괜찮다. 앉는 자리가 조금 불편하지만 감도 높은 매장이다. (저 선반 위에 크기 별로 놓인 하사미 포셀린들…)

직원분들이 대충하지 않고 음료나 빵을 매뉴얼대로 정확히 만들어서 내놓는다는 느낌을 준다.


남강 유람선

써니가 남강 유람선 꼭 타보라는 리뷰 봤다고 해서 왔는데… 추천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굳이 길게 안 적을게요~


목요일 오후 네시

허쌤이 추천해주신 목요일 오후 4시라는 카페에 왔다.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내린 커피와 진주에서 나는 키작은 밀을 쓴 에그타르트를 파는 곳이다. 경남문화예술회관 뒤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있는 곳이다. 카페 이름처럼 평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서울로 가는 버스 타기 전까지 여기서 시간 보냈다. 원두도 한 팩 구매했다. 싱글 원두는 주로 약배전으로, 블렌디드 원두는 중배전으로 로스팅한다고 했다.

책장에 LP 세장 있길래 봤는데 수프잔 스티븐스 앨범이…

아니나 다를까 이 앨범도 있었다.

이 공간이 주는 무해하고 선량한 느낌은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런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