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1일

나는 이 공간들을 좋아한다.

만약 내가 카페를 만든다면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 대해 깊게, 가만히 생각해보고 그 중에서 나를 매료시킨 요소들을 찾아보라는 조수용님의 말(<일의 감각>에서)을 보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을 떠올려봤다.

1. 육장정 (송리단길)

육장정은 육개장을 파는 식당이다. 망원동에 있는 육장이 본점이고 육장 사장님의 가족들이 서울에 몇개 분점을 낸 것으로 안다. 육장정은 그 중 하나로 송리단길에 있다. 원래 예전 망원동에 있던 육장을 참 좋아했는데, 인근의 다른 장소로 가게를 옮기면서 예전 느낌이 많이 사라져서 아쉽다.

여기가 예전 육장이었다. 이 때는 육라면 먹었네. 육개장(육라면)+밥+깍두기+후식 과일 구성은 늘 변함이 없고… 과일은 계절마다 조금씩 다르다.

여기는 옮긴 후 육장에서… 망원 본점에서는 레몬 육개장 같은 실험적인 메뉴를 가끔 운영한다. 맛은 같지만 분위기가 꽤 달라졌다.

송파구로 이사오고 나서 좋은 점은 송리단길에 있는 육장정이 가깝다는 점이다. 망원동 육장과 같은 맛에 예전 육장의 바이브가 느껴지는 공간이라 더 좋다. 바 형태로 된 좌석에 부부 사장님이 늘 있고 랜덤으로 플레이되는 재즈 음악이 나온다. 사람들은 말 없이 육개장을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 공간이다. 예전 망원이나 송파나 따뜻한 음식 같이 나눠 먹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하는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다.

2. 살롱 드 상파울루

살롱 드 상파울루는 이발소다. (미용실인가…)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가기 시작해서 거의 10년 정도 다닌 것 같다. 머리를 자르는 건 늘 스트레스였다. 예전엔 요령이 없어서 매번 가까운 체인 미용실에 가는데 매번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되니 내가 원하는 걸 명확하게 설명하기도 어려웠고 결과도 예측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살롱 드 상파울루는 예약제로 운영되는 1인 이발소다. 딱히 어떻게 자르고 싶은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나한테 어울릴 것 같은 머리를 먼저 제안해주실 때도 있는데 그런 것 역시 받아들일 정도로 신뢰가 쌓였다.

늘 파마를 하던 때의 모습이네. 저 땐 애플워치도 있었고 TCC 더코아클라이밍에서 만든 그립톡을 폰에 붙이고 다녔구만.

상파울루는 사장 형님의 별명이다. 형님과는 초반 1~2년 동안은 거의 머리를 자르거나 펌을 하는 동안에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너무 힙스터 형님 같아서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나도 낯을 꽤 가리는 사람이라… 그리고 상파울루 형도 먼저 말 하지 않으면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지금이야 뭐… 머리 자르는 시간 동안 할 얘기 안 할 얘기 다 하다 오는 것 같다.

상파울루를 좋아하는 이유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일관된 취향이 느껴지는 공간이고, 그 취향과 미감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상파울루에서는 LP나 오래된 아이맥으로 늘 재즈 음악이 흐른다. 나무로 직접 만든 수납장들이 있고, 가리모쿠 소파가 있는 공간이다.

3. 그래픽 바이 대신

어렸을 때부터 만화책 보는 것을 좋아했다. 드래곤볼 1~42권을 또 보고 또 보고 했던 것 같다. 맨날 같은 만화를 봤던 걸 보면 장르 자체를 좋아했다기 보다는 만화책을 보는 행위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작년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동네 근처에 이 공간이 생긴 건… 축복처럼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괜찮은 만화방에 다녀왔다고 말했을 때의 표정과 그래픽 바이 대신의 공간 사진을 보여줬을 때의 표정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늘 즐겁다. 그런 한편 이 공간이 기존의 선입견에 얼마나 도전하고 끝까지 밀어부쳐서 만들어진 결과물인가 싶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안락하게 만화를 보는 공간이 지적일 수 있을까? 그래픽 바이 대신은 그렇다고 말한다. 공간에 한번 압도 되었다가, 섹션별로 분류되어 있는 만화책들을 보면 이 공간의 핵심 경험은 콘텐츠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책 보는 공간 위로 올라오면… 미국 느낌 나는 치즈피자, 페페로니 피자를 파는 곳이 있다. 이 공간에 내가 싫어할 수 있는 요소는 단 하나도 없다. 매킨토시 앰프와 대형 스피커에서 재즈 음악이 흐르고, 그 누구도 시끄럽게 대화하지 않는다. 만화책을 보거나 쉬는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다.

4. 헬카페 뮤직

비교적 최근에 빠진 공간이다. 처음 알게 되고 나서 2주 동안 주말마다 갔다. 헬카페도 서울에 여러 곳이 있지만 여기는 뮤직이라는 이름처럼 청음 경험에 집중한 일본의 킷사 같은 공간이다. 카페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웨스트민스터 로얄 스피커 한 쌍에서 나오는 큰 볼륨의 음악이 바로 느껴진다.

뉴진스 하니 얼굴이 있는 LP도 항상 저 자리에 놓여있다. 가리모쿠 카페 테이블이 깔린 자리가 있고, 바 자리가 있다. 모든 자리는 마치 무대 객석처럼 스피커를 향하게 되어 있다. 카카오맵이나 네이버 리뷰를 보면 음악이 너무 커서 아쉽다는 리뷰가 종종 보인다. 말 없이 음악을 듣는 카페가 있다는 인식이 없어서다. 사람들과 대화하기에 좋은 카페는 아니다.

테이블 자리는 음악의 볼륨을 뚫고 대화를 하고 말겠다는 사람들이 성량을 높이는 경우가 있어 무조건 바 자리에 앉는다. 테이블 마다 생화가 놓여 있다. 라떼가 맛있다. 라떼를 시켜놓고 가만히 앉아서 음악을 듣는다. 주로 재즈가 나오고 에고래핑, 키린지 같은 예전 일본 음악이 나올 때도 있는데 좋다.

라떼는 첫 모금을 꼭 바로 마실 것을 안내한다. 그래야 맛있으니까. 이런 고집과 취향이 있는 공간이 나는 너무 좋다.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꽃은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을… 이런 카페에서는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서 이 공간을 같이 온전히 즐기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들은 이렇게 나열해놓고 보니 정말 딱히 초역세권이나 상권 중심에 있거나 하진 않네. 신기하다. 다만…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겠고, 나무 질감의 집기들로 따뜻한 느낌이 있고,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시끄럽지 않고, 재즈가 흐르는 공간이라는 게 공통점이네.

내가 나중에 어떤 공간을 만든다면 어떤 공간이 될지는 모르지만 늘 재즈를 틀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