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6일

2026년 추석

나이가 들수록 왜 명절은 더 싫을까.

나이가 들수록 왜 명절은 더 싫을까. 가족들과는 딱히 별 할말이 없고, 묻는 말에 대답하기도 귀찮다. 어딜가나 시끄럽고, 북적이는 통에 숨쉬기가 어려워 잠자코 앉아있거나 누워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가족들의 집에서든, 기차에서든 연휴 내내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으니 허리 통증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추석 연휴의 절반을 돌고나서야 겨우 집에 돌아와 내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린다.

수요일 밤

연휴의 시작이었던 수요일 밤, 선희랑 <가능한 사랑> 보고 집에 와서 맥주 마셨다. 영화 생각이 한참이고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목요일

수요일 오전에서야 연휴의 첫날인 목요일 오전에 대구로 가는 KTX 티켓을 구했다. 이번 명절은 연휴가 짧아 특히 기차표 구하기가 어려웠다. 새 집도 마련했고, 내심 집이 궁금해서라도 부모님이 서울로 오시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무감으로 집에 가느라 이렇게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난 오전 8시에 서울에서 출발, 선희는 10시 30분에 출발하는 티켓이라 내가 먼저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기차역, 공항 같은 터미널이나 고속도로 휴게소는 어딘가 들떠 있거나 혹은 지친 사람들의 얼굴을 너무 많이 봐야 해서 힘든 곳이다.

몇주 전에 출근하려는데 외할머니에게서 카톡이 왔다. 건강하라는 움짤 같은 것이었는데, 깜짝 놀라(1. 외할머니가 갑자기 왜 카톡을 보냈지? 2. 외할머니가 어떻게 카톡을 보냈지?) 전화 드렸더니 요즘 아프다고 하셨다. 추석 때 대구 가면 찾아뵙기로 하고 통화 마무리해서… 대구 도착해서 서울에서 10시 기차 타고 온 선희 합류하자마자 외할머니 뵈러 갔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최근 근 한달 간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로 거의 외출을 못하셨다고 한다. 할머니 집은 13층인데, 90 노인에게 엘리베이터 고장은 고립이나 다름 없다. 그 사이 불안, 공황 증세가 생겼다. 검사를 해봐도 신체는 건강하신데, 자꾸 상상으로 통증을 느끼거나 잠을 못 이루신다고 했다. 예전만큼 농담도 안 하시고… 나이가 들면 몸이 점점 불편해지는 것처럼 정신적으로도 어느 정도 퇴화되어야 하는데 너무 또렷하고 생각도 많이 하셔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외할머니 집 갔다가 KBS에 들렀다. 3시 50분쯤 도착했는데, 1부 영업이 5시까지라 딱 1시간 정도 앉아 있다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한 공간이었다. 손님은 선희와 나밖에 없었다. 집 근처 <담대하게 커피워크>도 좋은 공간이지만 너무 재즈 일변도라 음악이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반면 KBS는 재미있는 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마이클 헨더슨이랑 행크 모블리… 저번 방문 때는 사장님이 너무 예민해 보여서 아예 아무 말도 안하고 커피 마시고 음악 듣다 나왔는데, 이번엔 인사도 건네고 재밌어 보이는 판도 소개 받았다. 사장님도 아이폰 se 쓰고 있었다(…) 선희가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했다.

사장님이 사진 찍어 가라고 자켓 앞 뒷면이랑 LP까지 꺼내서 보여줬다. 처음 보는 판인데 음악은 뭔가 앰비언트 같았다. 알고보니 도쿄의 pharos coffee라는 카페에서 굿즈(!)로 만든 판이라고 한다. 자켓 디자인은 대만의 HOUTH라는 팀에서… HOUTH…? 알고보니 전에 퍼블리셔스 테이블에서 봤던… 타투이스트 인터뷰집 만든 그곳이었다. 이런데랑 남의 돈 써서 같이 일해보고 싶다… (도둑놈 심보)

gramm - Personal Rock 이런 자기 주장 없는 음악도 요즘 들어 좋다.

대구 집에 왔는데 마당 테이블에서 고기 먹기로 했다. <가능한 사랑>에서 설경구네 집에 있던 대리석 테이블이 자꾸 생각났다. 추석 전야라 달도 잘 보였는데 마침 다음 날 비 예보가 있어 달무리까지…

저번 설 때 내가 사와놓고는 집 김치냉장고에 넣어두고 까먹고 마시지 못한 와인이 한병 출토되어… 맛있게 마셨다.

금요일

추석 당일. 아침 일찍 할아버지 산소에 갔다. 가는 동안 차가 좀 막혔다. 재작년에 아버지가 앞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관리는 어떻게 할지 생각해봤냐고 하셔서… 전혀 생각해 본 적 없고, 그냥 바로 생각해보기엔 내가 주말에 대구까지 와서 산에서 풀 뽑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 이후로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하거나 깊게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은 없다. 간단히 차례를 지내고, 오는 길엔 내가 운전해서 왔다. 집에 가서 엄마가 밥 차릴까봐 그냥 밖에서 먹고 들어가자고 했다. 다행히 문여는 찜갈비 집이 있어서 갈비 먹고 집에 들어왔다.

찜갈비 먹는데 소주 너무 마시고 싶어서 딱 한 잔 받아놓고 여러 모금으로 나눠서 마셨다. 정말 한 잔만 마셨다. 이렇게 마시니까 소주가 맛있게 느껴졌다. 대구 집으로 돌아오니 피로가 몰려왔다. 눈 좀 붙이고 일어나 정신을 집중해 집에 놓을 LP 수납장을 주문했다. 또 한참 대체품을 찾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내 마음이 가리키는 정답을 찾아 주문했다.

집으로 귀가… 명절을 굉장히 잘 표현하는 것 같은 장면이 있어 찍었다.

토요일

이틀을 못 달렸더니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홍제천으로 나갔다. 어디까지 달릴까 하다가, 최근에 가보고 싶어진 카페가 있어 카페까지 가보기로 했다. 집에서 홍제폭포까지 뛰어갔다, 다시 돌아와 포방터 시장에 있는 카페 <바냐 아저씨>에 갔다. 체호프 희곡에서 가져온 것일까,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가 맡은 배역인 바냐 아저씨에서 가져온 것일까(그 또한 체호프 희곡 <바냐 아저씨>긴 하지만)

이게 가게 간판이다. 좋다.

벽에는 이런 영화 포스터가… 역시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가 있다. 라디오헤드 Kid A 앨범이 쭉 연달아 재생되고 있었다.

메뉴판. 핸드드립 커피만 파는 곳인데 두잔씩 마셔야 할 것 같은 가격이다. 케냐 응고라노 AA 워시드 먼저 마시고, 에티오피아 벤치마지 게샤 워시드 한 잔 더 마셨다.

사장님과 이야기 잠깐 나눠보니… 원래 유니클로 알바하면서 여기는 금, 토, 일만 열었는데 어제부로 유니클로 알바를 그만뒀다고 한다. 이제 10월에는 무휴로 매일 열어보고 가장 매출 안 나오는 요일 하루를 쉬는 날로 정할거라고 했다. 본인도 러너라서 달리기 하는 분들이 땀흘리면서 카페에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카스D 한병도 얻어마셨다. 여기에 앞으로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선희 할머니네 갔다가… 선희가 유니클로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명동으로 갔다. 선희 할머니네에서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고 혼났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 같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 괴로운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미안합니다…

남대문시장 들러서 그릇 몇개 골랐다. 신중하게 접시 하나, 면기 두 개 골라서 집으로 돌아왔다. 멋진 그릇들 보니까 마음이 어찌나 편해지는지. (끝)